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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키 가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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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오키 가즈오는 일본의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1916년 도쿄 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입성했다. 외국환 관리법 제정에 참여하여 초대 외국환 관리부장을 역임했으며, 기획원 차장과 총재를 거쳐 아베 노부유키 내각에서 재무대신 겸 기획원 총재를 지냈다. 중화민국 임시정부 특명 전권대사, 대동아 대신을 역임하며 전시 경제 체제를 구축하고 대동아 회의를 감독했다. 전후에는 전범 혐의로 수감되었으나 석방된 후 참의원 의원으로 4선 했으며, 자유민주당 내 우익 파벌에 가담하여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반대했다. 신에쓰 방송 이사, 나가노 방송 초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1971년 욱일대수장 1등급을 받았다. 1982년 사망했으며, 종2위로 서위되고 은배 1조를 하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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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키 가즈오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아오키 가즈오 (1940년대)
이름아오키 가즈오
원어 이름青木 一男 (Aoki Kazuo)
출생일1889년 11월 28일
출생지일본 나가노현 사라시나군
사망일1982년 6월 25일
학력도쿄대학 (구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소속 정당자유당 → 자유민주당
최종 계위종2위
훈장훈1등 욱일대수장
학위법학사 (도쿄제국대학, 1916년)
경력
대동아 대신내각: 도조 히데키 내각
임기 시작: 1942년 11월 1일
임기 종료: 1944년 7월 22일
전임: 직위 신설
후임: 시게미쓰 마모루
대장대신 (재무대신)내각: 아베 노부유키 내각
임기 시작: 1939년 7월 30일
임기 종료: 1940년 1월 16일
전임: 이시와타 소타로
후임: 사쿠라우치 유키오
참의원 의원선거구: 전국구
당선 횟수: 4회
임기 시작: 1953년 5월 3일
임기 종료: 1977년 7월 3일
귀족원 의원선출 방식: 칙선 의원
임기 시작: 1939년 8월 28일
임기 종료: 1946년 1월 11일
기타 직책자유민주당 참의원 의원회장 (6대)
총재: 사토 에이사쿠
임기 시작: 1965년
임기 종료: 1966년

2. 생애

아오키 가즈오는 나가노현 사라시나군(현 나가노시) 출신으로, 1916년 도쿄 제국대학 법과 졸업 후 대장성 관료가 되었다. 그는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 아래에서 재무국장을 지내며 외국환 관리법(1933년) 등 경제 통제 관련 법률 제정에 관여했으며, 국가총동원법 입안에도 참여하여 중일 전쟁 이후 일본 경제의 전시 경제 체제 전환에 기여했다.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에서 기획원 총재(1939년)를, 아베 노부유키 내각에서는 대장대신을 역임했다. 이후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특명 전권대사로 활동했으며,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는 초대 대동아대신으로 임명되어 대동아 회의(1942년)를 감독하는 등 대동아공영권 구상 실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43년에는 자카르타에서 모하마드 하타 등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만나 독립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1]

일본의 항복A급 전범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재판 없이 석방되었고, 1953년 참의원 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하여 4선 의원을 지냈다. 자유민주당(LDP) 소속으로 활동하며 당내 우익 파벌에 속해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고 주오 자동차도 등 고속도로 건설을 지지했다.

정계 은퇴 후에는 신에쓰 방송나가노 방송 등 언론계 활동에 참여했으며, 1971년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1981년 자서전을 출간하고 1982년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관료 경력

나가노현 사라시나군 마키고 촌(현 나가노시)의 농가에서 아오키 젠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3] 고등 소학교 졸업 후 농업에 종사하려 했으나, 아버지의 권유로 나가노 중학교에 진학했다. 이후 제1고등학교를 거쳐 1916년(다이쇼 5년) 도쿄 제국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들어갔다.

대장성 입성 후 예금부 운용과장, 재무대신 비서관 겸 비서과장, 이재국 국고과장 등을 역임했다. 다카하시 고레키요 재무대신 아래에서 국고과장으로 재직하며, 사코미즈 히사츠네와 함께 외국환 관리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 법안은 1933년(쇼와 8년) 일본 제국 의회를 통과하여 같은 해 5월 1일에 시행되었으며, 아오키는 초대 외국환 관리부장에 취임했다. 당시 일본은 환율에 대한 포괄적인 국가 통제를 시도한 적이 없었기에, 이 법은 미곡 통제법(1933년 공포, 식량관리법 제정으로 폐지), 석유업법(1934년 공포) 등과 함께 일본에서 경제의 전략적 부문에 대한 국가 통제를 강화하고 계획 경제적 성격의 경제 통제법의 효시로 평가받는다.[4][5] 1934년(쇼와 9년)에는 이재국장으로 승진했다.

가야 오키노리, 이시와타 소타로와 함께 "재무성의 삼우"로 불렸으나, 히로타 내각의 바바 에이이치 재무대신에 의한 인사 개편으로 대만 사무국 차장으로 전출되었다. 그러나 1937년(쇼와 12년) 내각총리대신 고노에 후미마로의 요청으로 기획원 창설에 참여하여 차장에 취임했으며, 1939년(쇼와 14년)에는 총재가 되었다. 그는 또한 국가총동원법을 기초한 위원회에 참여하여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일본 경제를 전시 경제 체제로 전환하는 데 기여했다. 1938년(쇼와 13년)에는 기획원이 설립을 추진한 동아연구소의 이사에도 취임했다.[7] 1939년 8월 28일에는 귀족원 칙선 의원으로 임명되었다.[6]

같은 해 8월, 기획원 총재직을 유지한 채 아베 노부유키 내각에서 대장대신으로 처음 입각했다. 아베 내각이 총사퇴한 후에는 왕징웨이 정권의 특명 전권대사 고문으로 난징에 부임하여 경제 정책을 지도했다. 1942년(쇼와 17년), 도조 내각 하에서 신설된 대동아대신으로 임명되어 대동아회의 개최 등을 감독했다. 그의 부하로는 이마이 다케오 등이 있었다.

대동아대신 재임 중이던 1943년 5월, 일본 점령 하의 바타비아를 방문하여 모하마드 하타를 만났다. 하타는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를 대표하여, 일본이 버마국이나 필리핀 제2공화국처럼 인도네시아에 독립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지 않으면 일본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조언했다. 아오키는 이 문제를 도조 총리에게 제기하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도조는 1943년 6월 의회 연설에서 말라야,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 술라웨시에 대한 독립 부여 의사를 언급했다.[1]

2. 2. 전시 경제 체제와 대동아공영권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 아래에서 재무국장으로 재직하며, 자신의 법학 배경을 활용하여 외국환 관리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 법안은 사코미즈 히사츠네의 도움을 받아 마련되었으며[4][5], 1933년 봄 일본 제국 의회를 통과하여 같은 해 5월 1일 시행되었다. 이는 일본 최초로 환율에 대한 포괄적인 국가 통제를 시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아오키는 같은 날 초대 외국환 관리부장에 취임했다. 이후 쌀 관리법(1933년)과 석유 관리법(1934년) 제정에도 관여하며 경제의 전략적 부문에 대한 국가 통제를 강화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러한 법들은 이후 국가총동원법 등 일본의 본격적인 경제 통제 법제의 효시로 여겨진다[4][5]

아오키는 국가총동원법을 기초한 위원회에도 참여하여,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일본 경제를 전시 경제 체제로 전환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37년에는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요청으로 기획원 창설에 참여하여 부총재에 취임했고, 1939년에는 총재가 되었다. 이 기간 중인 1938년에는 기획원이 설립을 추진한 동아연구소의 이사에도 이름을 올렸다[7]。1939년 8월 28일에는 귀족원 칙선 의원으로 임명되었다[6]

같은 해 8월, 아오키는 기획원 총재직을 유지하면서 아베 노부유키 내각의 대장대신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입각했다. 아베 내각이 물러난 후에는 왕징웨이 정권의 특명 전권대사 겸 고문으로 난징에 파견되어 경제 정책 수립을 지도했다.

1942년에는 도조 히데키 내각 하에서 신설된 대동아 대신의 초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직책에서 그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 논리인 대동아공영권 구상을 구체화하는 대동아 회의 개최(1942년 11월) 등 관련 정책을 감독했다. 당시 그의 부하로는 이마이 다케오 등이 있었다.

1943년 5월, 아오키는 일본 점령 하의 바타비아를 방문하여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지도자 모하마드 하타를 만났다. 하타는 일본이 버마국이나 필리핀 제2공화국처럼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지 않으면 일본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오키는 이 문제를 도조 히데키 총리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도조는 1943년 6월 의회 연설에서 말라야,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 술라웨시에 대해 1년 안에 독립을 부여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1]

2. 3. 전후 정치 활동

일본의 항복 이후인 1945년 12월 2일,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아오키 가즈오를 A급 전범 혐의자로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그가 대만 사무국 차장, 기획원 총재, 난징 정부 재정 고문, 대정익찬회 부총재 등을 역임한 경력 때문이었다.[8] 그는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재판 없이 1948년에 석방되었다. 석방 후에는 변호사로 활동했다.

공직 추방에서 해제된 후인 1953년, 제3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전국구 후보로 요시다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9] 이후 보수 세력이 통합하여 자유민주당(LDP)이 창당되자 당적을 옮겼으며, 이시이 파(수요회)에 속했다. 그는 참의원에서 예산위원회, 대장위원회, 내각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자유민주당 참의원 의원회 회장을 지내는 등 총 4번 당선되었다.

1956년에는 구 내무성 관료 출신인 야마자키 이와오, 마치무라 긴고 등과 함께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 내에 치안대책특별위원회(치대위)를 설립하고 초대 위원장에 취임했다. 이 위원회는 국제 공산주의와 연계된 국내 세력의 활동 및 일교조의 편향 교육 문제 등에 대응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아오키는 위원장으로서 경찰청의 기동대 증강과 공안조사청의 예산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10]

1960년에는 지바 사부로, 기무라 아쓰타로 등과 함께 우익 성향의 그룹 素心会|소심회일본어를 결성했다. 이들은 친대만 입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회복에 강하게 반대했다. 또한, 그는 고속도로망 건설, 특히 주오 자동차도 건설 추진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63년에는 중앙 자동차도 건설 추진 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기존 계획 노선을 변경하여 현재와 같이 고후오카야를 경유하는 우회 노선으로 확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65년 제7회 참의원 선거에서는 아오키 측의 대규모 불법 문서 배포 행위가 적발되어 일본 세리사 연합회 회장 등이 체포되는 사건이 있었다.[11]

정계 활동 외에도 아오키는 언론계에도 관여했다. 공직 추방 해제 후 신에쓰 방송 고문을 지냈으며, 1968년 나가노현의 두 번째 민영 방송사인 나가노 방송이 설립되자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여 1980년까지 재직했다.

1977년 정계를 은퇴했으며, 1972년부터 은퇴 시까지 최고령 국회의원이었다. 1981년에는 회고록 『나의 90년의 생애를 돌이켜보며』(고단샤)를 출간했다. 1982년 6월 25일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정3위에서 종2위로 추서되었고, 은배(銀杯) 1조를 하사받았다.[12]

2. 4. 은퇴와 사망

일본의 항복 이후, 아오키는 다른 전직 정부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전범 혐의로 체포되어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그는 재판 없이 1948년에 석방되었다.

석방 후 아오키는 개인 법률 사무소를 열었다. 1953년에는 자유당의 지원을 받아 전국구로 참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자유민주당(LDP) 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서 세 차례 더 당선되었다. 그는 1960년 자민당 내 우익 파벌에 가담하여, 일본이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중화민국에 대한 일본의 승인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의 전국적인 고속도로망 건설, 특히 주오 자동차도 건설을 강력히 지지했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 아오키는 신에쓰 방송 이사회에 참여했으며, 1968년에는 나가노 방송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 되었다. 1971년에는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그는 1981년에 자서전을 출판했으며, 1982년에 사망했다.

3. 정책 및 사상

아오키 가즈오의 정책과 사상은 일본 경제에 대한 국가 통제 강화와 전시 경제 체제 구축에 중점을 두었다. 대장성 관료 시절, 그는 외국환관리법, 미곡 통제법, 석유업법 등 주요 경제 법안 제정을 주도하며 국가가 경제의 전략적 부문을 직접 통제하는 기반을 마련했다.[4][5] 이는 당시로서는 드문 강력한 국가 개입 시도였다.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에는 국가총동원법 입안에 참여하고 기획원 총재, 대장대신 등을 역임하며 일본 경제를 전시 체제로 전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도조 히데키 내각 하에서 신설된 대동아대신으로 임명되어 대동아 회의를 주관하는 등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 정책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담당했다.[1]

패전 후 전범 혐의로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아오키는 정계에 복귀하여 참의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자유민주당 내 우익 파벌에 속하여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정상화에 강력히 반대하고 중화민국과의 관계 유지를 주장하는 등 보수적인 정치 노선을 견지했다. 국내적으로는 전국적인 고속도로망 건설, 특히 주오 자동차도 건설을 지지하며 인프라 확충에 관심을 보였다. 그의 사상은 일관되게 국가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며, 경제 운용에 있어 국가의 강력한 통제와 개입을 중시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3. 1. 경제 정책

대장성 관료 시절 아오키는 일본 경제 정책, 특히 국가 통제 강화에 깊이 관여했다. 도쿄 제국대학 법과 졸업 후 1916년 대장성에 입성하여 예금부 운용과장, 재무대신 비서관 겸 비서과장, 이재국 국고과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가야 오키노리, 이시와타 소타로와 함께 "재무성의 삼우"로 불리기도 했으나, 히로타 내각의 바바 에이이치 재무대신에 의해 대만 사무국 차장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다카하시 고레키요 재무대신 시절 국고과장으로 재직하며, 자신의 법학 지식을 바탕으로 사코미즈 히사츠네를 통해 외국환관리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 법안은 1933년 일본 제국 의회를 통과하여 같은 해 5월 1일 시행되었고, 아오키는 초대 외국환 관리부장에 취임했다. 이는 당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포괄적인 외환 국가 관리 시도로, 일본 경제 통제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외국환 관리법에 이어 그는 미곡 통제법(1933년 공포, 식량관리법 제정으로 폐지), 석유업법(1934년 공포) 등 주요 산업에 대한 국가 통제를 강화하는 법안 제정에 관여했다. 이러한 법들은 이후 국가총동원법과 함께 일본에서 본격적인 경제 통제 체제를 구축하는 기초가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4][5] 1934년에는 이재국장으로 승진했다.

아오키는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일본 경제를 전시 경제 체제로 전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국가총동원법을 기초한 위원회에 참여했으며, 1937년에는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요청으로 기획원 창설에 참여하여 차장에 취임했고, 1939년에는 총재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기획원이 설립을 추진한 동아연구소의 이사도 겸임했다.[7] 1939년 8월 28일에는 귀족원 칙선 의원에 임명되었다.[6]

같은 해 8월, 아오키는 기획원 총재직을 유지한 채 아베 내각의 대장대신으로 입각했다. 아베 내각 붕괴 후에는 왕징웨이 정권의 특명 전권대사 고문으로 난징에 파견되어 경제 정책 수립을 지도했다. 1942년에는 도조 내각 하에서 신설된 대동아대신으로 임명되어, 피점령 지역에 대한 경제적 착취와 통제를 심화시키는 대동아회의 등의 정책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의 부하로는 이마이 다케오 등이 있었다.

3. 2. 대외 정책

아오키 가즈오는 다카하시 고레키요 재무대신 아래에서 국고과장으로 재직하며 외국환 관리법 제정을 주도했다. 사코미즈 히사츠네와 함께 법안을 만들어 1933년 통과시켰으며, 이는 일본 최초의 포괄적인 외환 국가 통제 시도였다. 이 법은 이후 일본 경제 통제 강화의 발판이 되었다.[4][5]

아베 노부유키 내각에서 대장대신을 지낸 후, 아오키는 왕징웨이 정권의 특명 전권대사 겸 고문으로 난징에 부임하여 경제 정책을 지도했다. 이후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는 1942년 신설된 대동아 대신으로 임명되어, 일본 제국주의 팽창 정책의 일환인 대동아 회의 개최 등 관련 시책을 추진했다.

1943년 5월, 아오키는 일본 점령 하의 바타비아를 방문하여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 지도자 모하마드 하타를 만났다. 하타는 버마국이나 필리핀 제2공화국의 사례처럼 일본이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지 않으면 현지에서의 지지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조언했다. 아오키는 이 문제를 도조 총리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이후 도조는 1943년 6월 의회 연설에서 말라야,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 술라웨시 등 동남아시아 점령 지역에 대해 독립을 부여할 의사가 있음을 언급했다.[1] 이는 전쟁 막바지에 몰린 일본이 점령지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일본의 항복 이후 전범 혐의로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아오키는 정계에 복귀하여 참의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1960년대에는 자유민주당 내 우익 파벌에 속해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정상화에 강력히 반대하고 중화민국과의 관계 유지를 주장하는 등 보수적인 대외 정책 노선을 견지했다.

3. 3. 국내 정치

나가노현 사라시나군 (현 나가노시) 출신으로, 1916년 도쿄 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들어갔다. 그는 빠르게 승진하여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 아래에서 재무국장을 지냈다. 다카하시는 아오키의 법학 지식을 활용하여 외국환 관리법 제정을 맡겼고, 이 법은 1933년 일본 제국 의회를 통과했다. 이는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환율에 대한 포괄적인 국가 통제를 시도한 사례였다. 아오키는 이어서 쌀 관리법(1933)과 석유 관리법(1934) 제정에도 관여하며 경제의 주요 부문에 대한 국가 통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국가총동원법을 기초한 위원회에 참여하여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일본 경제를 전시 경제 체제로 전환하는 데 역할을 했다.

1937년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는 아오키를 기획원 부총재로 임명했고, 1939년에는 총재로 승진했다. 같은 해 귀족원 의원으로 지명되었다. 아베 노부유키 내각에서는 1939년 대장대신을 맡으면서 기획원 총재직도 겸임했다. 아베 내각 붕괴 후 잠시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특명 전권대사로 파견되어 경제 정책을 지도하기도 했다. 이후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신설된 대동아대신으로 임명되어 1942년 11월부터 활동하며 대동아 회의를 감독했다.[1]

일본의 항복 후, 아오키는 다른 전직 정부 각료들과 마찬가지로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전범 혐의로 체포되어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그는 별도의 재판 없이 1948년에 석방되었다. 석방 후 개인 법률 사무소를 열었으며, 1953년에는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전국구 참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이후 자유민주당(LDP) 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서 세 차례 더 당선되었다. 그는 LDP 내에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정상화에 강하게 반대하고 중화민국과의 관계 유지를 주장하는 우익 파벌에 속했으며, 일본의 전국 고속도로망 건설, 특히 주오 자동차도 건설을 적극 지지했다.

정계 은퇴 후에는 신에쓰 방송 이사회에 참여했으며, 1968년 나가노 방송 설립에도 기여했다. 1971년에는 욱일대수장 1등급을 받았다.

4. 논란 및 비판

아오키 가즈오는 A급 전범 혐의로 수감되었던 이력과 제7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의 부정 행위 등으로 인해 논란과 비판을 받았다.

4. 1. 전범 행적

일본의 항복 이후, 1945년 12월 2일 연합군 최고사령부대만 사무국 차장, 기획원 총재, 난징 정부 재정 고문, 대정익찬회 부총재 등의 경력을 문제 삼아 아오키 가즈오의 체포를 일본 정부에 명령했다(제3차 체포자 59명 중 1명).[8] 이에 따라 아오키는 A급 전범 혐의자로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1948년, 별도의 재판 없이 석방되었다.

4. 2. 선거 부정

1965년 제7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는 대규모 불법 문서 배포가 적발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일본 세리사 연합회 회장 등이 체포되었다.[11]

5. 역대 선거 기록

5. 1. 참의원 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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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락선거투표일선거구정당득표수당선 순위 / 당선자 수 (후보자 수)
당선제3회 참의원 선거1953년 (쇼와 28년) 4월 24일전국구자유당289,68919/50 (258)
당선제5회 참의원 선거1959년 (쇼와 34년) 6월 2일전국구자유민주당386,09429/50 (123)
당선제7회 참의원 선거1965년 (쇼와 40년) 7월 4일전국구자유민주당573,44623/50 (99)
당선제9회 참의원 선거1971년 (쇼와 46년) 6월 27일전국구자유민주당445,78949/50 (106)
당선 횟수: 참의원 4회


6. 서훈



'''외국 훈장 착용 허가'''

7. 가족 관계


  • 사위는 도쿄 대학 총장을 지낸 가토 이치로(加藤一郎)이다.
  • * 손녀는 가토 이치로의 딸이자 전 중의원 의원, 전 후생노동대신을 역임한 고미야마 요코(小宮山洋子, 옛 성: 가토)이다.
  • 동생은 에히메현 지사를 지낸 아오키 시게오미(青木重臣)이다.[3]

참조

[1] 서적 The Encyclopedia of Indonesia in the Pacific War Brill
[2] 간행물 『官報』第5698号 1946-01-14
[3] 서적 『人事興信録』第14版 上
[4] 서적 青木一男 その信念と行動 1970-06-30
[5] 서적 帝国陸軍の栄光と転落 文春新書 2010-04
[6] 간행물 『官報』第3795号 1939-08-29
[7] 뉴스 東亜の人文・自然を研究、会長は近衛首相 東京朝日新聞 1938-09-02
[8] 뉴스 梨本宮・平沼・平田ら五十九人に逮捕命令 毎日新聞(東京) 1945-12-04
[9]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三省堂出版 2009
[10] 서적 わが九十年の生涯を顧みて
[11] 뉴스 税理士会長を逮捕 全国区青木派違反 日本経済新聞 1965-07-14
[12] 간행물 『官報』第16628号 1982-07-05
[13] 간행물 『官報』第2431号「授爵・叙任及辞令」 1920-09-08
[14] 웹사이트 沢本頼外五名 https://www.jacar.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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